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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천동 유적은 당시 이 지역의 수장(首長)급들의 묘로 일직선상(일자형)의 매장곽(부장품을 넣기 위해서 따로 준비한 공간)을 갖춘 대형목곽묘(덧널무덤)가 주류이다. 무덤 내에서는 철정(덩이쇠) 등 풍부한 철기류와 토기 등이 순장된 인골과 같이 출토되어 당시 그들의 경제적 부의 축적 뿐 아니라 정치적 권력집중도 잘 보여준다. 철 생산과 철기류의 사용은 복천동 유적을 조영한 세력의 성장기반이었다. 수혈식 석곽묘인 22호는 4세기 후엽에 발생한 것으로 지배층의 묘역에서 처음으로 채용되어 6세기까지의 가야의 옛터에 고총고분이 출현하는 양상과 시기가 같아서 그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복천동은 21·22호분(4세기 후엽에서 5세기 초) 단계부터 신라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어 신라문화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21·22호분 이후 5세기 말까지 묘제의 변화는 3단계로 나누어지는데, 부곽이 점차 없어지고 주곽(시체를 안치하기 위해서 마련한 공간)에 흡수되며 그로 인해 평면형태가 장방형에서 세장형(폭이 좁고 길이가 긴 무덤)으로 바뀌어진다. 또한 신라문화의 확산으로 볼 수 있는 경주 황남동 109호분의 3·4곽에서 출토된 유개식고배(뚜껑이 있는 고배)와 같은 형태가 복천동 21·22호에서 처음 나타나고 있다. |
혹자는 이것을 신라계토기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고총고분이 출현하는 시점에 어떠한 계기 또는 그
영향에 의해 낙동강 동안지역에 동시에 여러곳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있다. 10호분에서 마주가, 주곽인 11호분에서는 금동관·철제갑옷·환두대도
등이 출토되었으며, 22호분에서는 금동관, 샤머니즘적인 주술의 의미가 있는 청동제 7두령(방울이 7개가 달린 유물-제사에
쓰였다고 추정됨) 등이 출토되었다. |